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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C 컬쳐

삶을 하나의 무늬로 보다
<아메리칸 퀼트>

삶을 하나의
무늬로 보다

삶은 그리고 사랑은 한 장의 퀼트를 완성하는 것과 같다.
딱히 정해진 규격이나 패턴도 없다. 그저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다보면 가장 소중한 추억이 천 위에서 형태를 잡아갈 뿐이다.
퀼트를 통해 우리 삶을 직조해 나간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듯이.

글·사진 편집실

다양한 삶이 녹아들다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고통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주는 재료가 된다. 그리하여 최후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퀼트는 다채로운 패턴의 무늬뿐만 아니라 바느질 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기쁨과 눈물, 아픔이 녹아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어제와 오늘,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일정한 규칙이 있는 기계화된 무늬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 없이 다양한 패턴과 바느질하는 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으로 삶을 직조해나가기 마련이다.

영화 <아메리칸 퀼트>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 딸에게 물려주는 퀼트처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그 삶의 지혜를 엮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비밀과 사연이 한 조각씩 이어져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 핀은 학교를 마치기 전 마지막 여름을 보내기 위해 캘리포니아 교외의 할머니 집을 찾아간다. 할머니의 집은 오랜 시간을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함께 지내온 여성들의 퀼트 모임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핀에게 가족이나 다름 없는 정다운 사람들로, 할머니를 비롯한 퀼트 모임은 핀에게 뜻깊은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웨딩 퀼트였다. 하지만 핀은 결혼을 앞둔 샘과 미래에 대한 의견 차이로 크게 다투고 결혼과 파혼의 갈림길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핀에게 퀼트 모임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에 대한 꿈과 기쁨, 절망과 고통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퀼트 모임의 친구들은 이렇게 각자 살아온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씩 덧대어가며 한 땀씩 수놓아 퀼트를 완성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핀 역시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얻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영화는 각자의 삶 이외에도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이 만들어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와 살아온 과정을 맛보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 역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룬 것처럼 어쩌면 전혀 다른 낯선 것에서 시작되어 하나의 큰 틀이 되고,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처럼 퀼트 역시 그런 부조화 속의 조화로움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두 장의 천이 만들어내는 새로움

퀼트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Culcita로 깃털이나 양모 등을 채워 넣은 주머니나 매트리스를 가리킨다. 자수나 아플리케가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퀼트의 목적은 방한과 보호에 있었고, 퀼트의 기본은 천을 두 장 겹쳐 안에 솜 등을 채운 뒤 새로운 천을 대어 만드는 것이다.

퀼트와 비슷한 것은 불교 그림의 하나인 만다라가 있다. 동그란 원 안에 다양한 무늬를 그리고, 그 속에 하나씩 색을 칠해 완성하는 만다라는 자신을 찾아가는 수행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만다라의 그림은 같은 형태에서 시작하지만 무늬를 넣고, 색을 칠하는 과정을 지나면 저마다 다른 만다라를 완성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대로 채워간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이루는 무늬를 완성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 어떤 만다라를 그리고, 어떤 퀼트를 만들어갈까. 기쁨과 행복, 상처와 후회가 모여 어떤 작품이 완성될지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제와 오늘의 무늬와 색깔이 예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망친 것이라고 치부하고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이다.

영화처럼 사랑은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인생 역시 머물러 있지 않다. 사랑은 갈 뿐이고, 사랑 속에 있다고 해도 단지 사랑의 추억과 내일의 희망과 어제와 오늘의 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내적 갈등을 갖고도 하나씩 작품을 완성해간다. 영화에서 퀼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과 마찰 때문에 퀼트를 완성할 수 있을지 때때로 의문이 들겠지만,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 모두 참여하여 끝내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이 우리 삶이고 사랑이기도 하다. 퀼트가 완성되면서 퍼즐을 맞추듯 사랑의 추억에 관해 각자의 상황은 모두 달라도 퀼트를 만들어가며 사랑이 머무는 곳은 바로 용서와 화해, 만들어 가는 것인지에 대해 알게 해주는 것이다.

여성의 일생과 사랑의 조각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주인공 핀. 그리고 주인집 도련님의 아기를 임신하게 되어 쫓겨난 흑인 할머니, 바람기 많은 화가 남편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해오던 할머니, 여동생이 자신의 남편과 부정한 관계를 갖고 평생 용서할 수 없는 배신감을 가진 할머니, 꿈 많은 다이버이자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지만 결혼 후 엄마와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할머니 등등. 영화에는 우리 주변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흐른다. 사랑에는 성별을 구분할 필요가 없지만, 퀼트를 만들어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여성의 일생을 퀼트와 함께 바라볼 수 있다.

누구나 그렇듯,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각자의 색깔과 모양대로 사랑을 하게 된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뜨개질과 바느질로 삶을 살아가며 딸에게, 손녀에게 뜨개질한 옷을 입혀주고 키워냈듯이 여성들은 자신의 딸과 그 후대를 위해 자신의 품을 팔아 무언가를 만들고 물려준다. 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다시 딸로 이어가는 그 시간의 직조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여성들만의 공감과 사유의 토대가 되는 건 아닐까. 영화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할머니들 역시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사랑이었다. 젊은 시절을 간직한 할머니들은 고된 세월의 풍파 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했고, 이제는 그 지지부진한 사랑보다 삶의 지혜를 더욱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바느질이나 설거지 등 집안일만 하는 여성의 일생이 아니라, 그저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여성이 아니라 삶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 극복하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인생의 황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여성의 일생과 사랑의 또 다른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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