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는 동사는 우리를 멈출 수 없게 한다. ‘걷다’가 걸으며, 걷고, 거닐다로 수없이 변형하는 동안 우리는 그 속에서 조금 빠른 박자로 뛰기도 한다.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바빠서 뛰는 동안 핸드폰의 안테나도 서지 않는 지리산 둘레길에서는 뛸 수 없다. 끝까지 걸어야만 한다.
글 최미연 / 사진 남원시, 구례구
반달가슴곰과 히어리라는 깃대종이 서식하는 곳으로 더욱 익숙한 우리나라의 명산 중 하나, 지리산. 지리산은 전남 남원, 구례, 경남 산청, 함양, 하동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국립공원 제1호의 명성에 걸맞은 장엄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리산의 명품 풍경이라면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지리산의 일출, 지리산의 운해, 지리산의 단풍이 그것이다.
산세는 비교적 유순하지만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 올라 일출을 보는 일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어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을만큼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게다가 천왕봉에 오르기까지는 노고단이라는 지리산 3대봉 중 하나가 있다. 노고단이란 말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여기서 할미는 국모신인 서술성모를 일컫는 말로, 이곳에서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노고단은 워낙에 경사가 심하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능선이 아니라 끝까지 오르막만 있는 산길이어서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하면 ‘노고가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도 노고단까지는 차량이 운행하고 있으니 지리산을 탐방하기에는 한결 더 수월해졌다.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노고단까지 차량을 이용하고 이후 능선을 따라 등산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대로 종주를 해보고 싶다면 2박3일의 종주 일정을 짜야 한다. 삶의 고단함도 잊게 해주는 지리산의 고단함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으면 나타나는 대피소이다. 대피소도 지리산의 한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어 어느 누가 들어가더라도 이질감이 없다. 다만 지리산은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대피소에서 머무르는 동안 샴푸나 세제 등을 사용할 수 없다.
지리산 종주를 하지 않더라도 둘레길을 걷기만 해도 지리산의 사계절 매력에 빠질 수 있다. 지리산은 수려한 계곡과 산새, 하늘과 구름 등 자연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큰 그림이다. 봄에는 세석과 바래봉에서 피어나는 철쭉,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벚꽃터널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싱그러운 신록과 시원한 폭포와 계곡이 반겨준다. 가을에는 피아골 계곡에서 시작되는 단풍과 만복대 등산길의 억새를 만날 수 있다. 피아골과 뱀사골에 가면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단풍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겨울에는 흰 눈이 뒤덮인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춥다고 집에만 있다가 흰눈이 장관을 이루는 지리산의 품 속에 들어서면 이제야 왜 왔는지 후회할 수도 있다. 담과 소, 73개의 골 곳곳에서 지리산 비경의 극치를 볼 수 있는 자연이 살아 숨쉬는 이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선물이 아닐까.
운봉구간 이후 다섯번째 구간인 동강-수철 구간에 이르면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산행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산길이 이어진다. 4개의 마을을 지나 산청에 이르는 곳이기도 하며 동시에 한국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구간이기도 하다. 또한 상사폭포에 이르면 시원한 물줄기가 마치 눈물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사랑하는 이와 이루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내려오기도 한다. 폭포를 지나 쌍재로 들어서면 옛날 봇짐 장수들이 함양에서 산청 방면으로 오갔던 고개로 주막과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쌍재 아래에는 보부상들을 위한 큰 쉼터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고령토가 많아 이를 채취하며 삶을 살았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남 구례와 섬진강을 걷는 길인 송정-오미 구간은 능선이 완만하다가도 다소 높게 올라가야 하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만한 땀을 흘릴 가치가 충분한 구간이다. 농로, 임도, 숲길 등 다양한 길을 이어가며 다양한 모습의 숲을 만날 수 있다. 조림현상과 산불로 다친 상처는 길을 걷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남한의 3대 길지 중 한곳으로 알려진 운조루를 향한 길은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섬진강을 옆에 두고 오미리를 향해 엎드려 절하는 오봉산이 만드는 풍광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오미마을은 조선시대의 양반가를 엿볼 수 있는 운조루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라는 글이 적혀 있는 쌀독이 있는데,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의미로, 마을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쌀독에 있는 쌀로 나눠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둘레길의 시작점인 주천 마을로 다시 가기 위한 여정은 산동-주천 구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산동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지하통로로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현천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현천마을 주차장이 보이는데 이 터널을 통과해 마을을 만나면 마치 일부러 누군가 빚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을 앞에 자그마한 저수지와 산수유 나무와 돌담이 있기 때문이다. 산으로 둘러 싸인 이 마을에서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음악회라도 열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저수지 둑을 따라가면 지리산 둘레길은 어느새 산등성이를 가로지른다. 계척마을은 산수유가 유명한 마을인데, 수령이 1천년쯤 됐다는 산수유 시목이 계척마을의 시작점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오랜 시간을 나이테에 담아 온 산수유 시목에 넋을 놓고 걷노라면 어느새 계척마을에서 밤재로 접어든다. 밤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편백나무숲을 지나는데, 이 숲에는 30년 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수만 그루의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어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 발 떨어져 지리산의 자연과 그 속에 어울리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푸르기 그지 없다. 가을 단풍이 계곡 깊이 스며들고,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우리도 지리산 품 속에 스며들어 떠나는 가을을 추억해본다.
오전 9:30 - 오후 18:00 (매주 월 휴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2길
전화 063-635-0850
전남 구례군 구례읍 서시천로 106
전화 061-781-0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