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좋다.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뒤이어 따라오자 한 여름 뜨겁던 바람과 태양은 어디로 갔는지 그새 흔적만 남겨놓고 돌아갔다. 9월, 높고 푸른 하늘과 나란히 걷고, 달리며 우리는 또 새로운 가을을 맞이한다.
글 최미연 / 사진 편집실, 광양시, 곡성군, 하동군, 경남도청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시작되어 임실, 곡성, 남원시를 지나 구례와하동을 거쳐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여러 지역을 여행하듯 흘러드는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계절의 모습을 담은 각 지역의 특색 있는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특히 봄에는 구례를 지나는 강줄기와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이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파란 강물과 울창하게 이룬 숲,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나무들, 겨울에는 설원이 펼쳐지는 장관을 만날 수 있다.
바야흐로 가을은 시원한 바람과 감미로운 햇살, 청명한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다. 섬진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길과 둘레길에서 청정한 자연과 홀가분하게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섬진강 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 증기기관차나 레일바이크를 타거나 철길 따라 달리는 17번 국도 드라이브도 섬진강의 풍광을 모두 만날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로 즐길 수 있다. 지난 2013년 개통된 148㎞의 섬진강 자전거길은 기존의 강변 도로와 제방을 활용해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코스는 길이가 꽤 되지만 길이 평탄해서 초보자도 이틀이면 완주할 수 있다. 여러 번 가보았더라도 자전거로 빠르고, 느리게, 자신만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섬진강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부터 가져가기 힘들다면 곡성군청소년야영장에서 자전거를 빌려 섬진강 변을 달리며 온몸과 온 마음으로 자연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 자전거로 여행하기 좋도록 자전거 전용도로도 잘 조성돼 있어 안전하고 여유로운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잔잔한 섬진강 물결을 따라 유유히 달리다 보면 어느새 빨리 달려온 어제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패달은 천천히 밟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가까이 두자. 농로를 활용해 만든 자전거 전용도로 곁에는 아기자기한 들꽃과 작은 풀잎들이 속삭이고 있다. 봄에는 매화가 꽃 길을 만들고, 여름에는 배롱나무 꽃이 이어지며, 가을에는 황홀한 단풍 축제가 벌어진다. 겨울에는 시린 바람이 불지만 조용하고 깨끗하게 이어진 흰 눈이 쌓인 길을 가면 자연의 모든 것이 내 것인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풍족하고 따뜻해진다. 이뿐만 아니라 섬진강에 모여든 청둥오리와 독수리 등 철새가 우리를 더욱 설레게 한다.
청소년야영장에서 출렁다리 아래로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이지만 자전거 라이딩을 하려면 섬진강종주자전거길 1코스로 가야한다. 섬진강댐에서 시작된 이 코스는 화문산 자연휴양림을 거쳐 김용택 시인생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장군목에 이른다. 코스 중간에 나타나는 구담마을에서는 야트막한 강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동네 어르신들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동네 어르신보다 더 반가운 수달을 만날 수도 있다. 엉금엉금 숲 쪽에서 강가로 건너가는 수달은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천연기념물 제330호이다.
자전거길이라고 해서 계속 달려야 하는 법은 없다. 달리기만 해 온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길이기 때문에 쉬엄쉬엄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가도 좋을 것이다. 광양과 구례 구간은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공단과 컨테이너 부두로 그 모습이 바뀌었지만 제철소의 높은 굴뚝이 있어도 자전거길이 시작되는 광양 배알도 해변을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펼쳐져 있다.
태인대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섬진강길은 하동~구례 간의 섬진강 물길을 ‘하동포구 80리’라고 부른다. 특히 이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그 풍광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동까지는 강폭이 넓고 들이 있지만 하동을 지나면 산은 조금씩 높아지고 강변 모래톱이 넓게 나타난다. 섬진교를 중심으로 다리를 건너면 하동읍이고, 남도대교를 건너면 화개장터다.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바로 그곳이다.
5코스가 시작되는 남도대교부터 코스의 마지막인 광양 배알도까지는 34.03㎞에 달한다. 가는 동안 강의 좌로방향에 자전거길이 있고 완만하지만 간혹 나타나는 급경사가 나타나 가는 길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밤나무가 우거져 있어 가을에는 밤꽃 향이 멀리서부터 코끝을 스치고, 길에 떨어진 밤송이에서 밤을 주워담는 일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재미가 있다. 급경사를 지나면 숲에서 벗어나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높고 완만한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왼쪽으로 펼쳐진 강의 모습이 산과 들과 어우러져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여유로운 라이딩을 하다보면 어느새 광양매화마을까지 쉽게 다다른다. 매화마을 초입에는 섬진강 매화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사람을 등에 태우고 나왔다는 두꺼비상이 마을의 전설처럼 지키고 있다. 두꺼비상의 전설은 옛날 여인이 한 명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에 들어와 눈을 껌뻑이길래 밥을 주고 3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동네가 물에 잠기자 미처 피하지 못한 여인이 물에 떠내려가자 두꺼비가 여인을 등에 업고 나타나 구해주었다는 전설이었다. 두꺼비는 지쳐서 죽고, 살아난 여인은 두꺼비 장사를 지내줬다고. 그래서 이 두꺼비가 도착한 곳을 ‘두꺼비 나루’라고 해서 ‘섬진’이라고 불렀다 한다. 은혜를 갚은 두꺼비와 인증샷을 찍은 후 갈대밭 풍경을 즐길때쯤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 옆을 지나 망덕포구에 이른다. 망덕포구에는 작은 식당이 몇 곳 있는데, 가을에는 뭐니뭐니해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탁 트인 강가를 앞에 두고 전어 회무침을 맛보는 것도 섬진강 길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섬진강 자전거길의 끝자락인 남도대교부터 배알도까지 가는 길에는 대나무 숲을 자주 만나게 된다. 시원하게 쭉 뻗은 대나무의 자태가 마음을 정갈하게 해준다. 배알도 수변공원에는 섬진강 자전거길 인증센터가 있는데, 이곳에는 작은 캠핑장이 있어서 가족단위의 캠핑족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배알도는 강의 아기자기함과 바다의 시원함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데크로 꾸며진 산책로도 조성돼 있어서 잠시 자전거를 내려두고 걸어보는 것도 좋다.
자연의 품에서 시원한 가을 바람과 청명한 가을 하늘을 곁에 두고 달리는 일은 초록의 숲과 들에서 파랑 하늘이 반기는 융단을 걷는 기분을 들게 한다. 잔잔한 섬진강은 강 상류인 섬진강댐부터 하류인 광양시 배알도 해수욕장까지 각각의 매력을 발산한다. 가을에는 섬진강 자전거길에서 불어오는 남풍을 온 몸으로 맞으며 지친 영혼에 쉼표를 주는 것은 어떨까.